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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요단강 건너기 - 믿음의 승리

by 오네시모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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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3장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통솔 아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가나안의 정복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강둑까지 넘칠 듯 출렁거리던 요단강이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되어 걸어서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

 

(여호수아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가나안 땅의 7 족속을 정복하기 전 큰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온 천하의 주인이 되심을 보여주심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 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를 진작시키시고 힘을 북돋아 주셨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모습은 40여년 전 홍해를 건넌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구원을 예표하는 홍해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께서 물을 먼저 가르시고 마른 땅을 만드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하나님께서 밤새 동풍을 일으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고 이미 말라버린 땅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이 100% 해 놓으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홍해에 발을 담글 필요도 없고 아무 수고도 없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길을 좇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지 아니한가? 아담의 범죄함으로 나면서부터 죄인이 된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죄를 씻으려 해도 하나님 앞에 멸망받을 죄인이다.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죄를 씻을 수 없다. 울어도 못 하고, 착해도 못 하고, 밤새 철야 기도를 하며 죄를 고백해도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죄인은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로마서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루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 했고 무슨 일을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 외에 인간은 아무도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마가복음 10:17-18) 

 

혹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예를 들면서 예수님 자신도 선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며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한 사람이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렀기에 질문자의 수준에 맞추어 "네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나를 선하다고 부르는 것은 사람이 선할 수도 있다고 잘 못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잘 못된 생각이다"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일 뿐이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타락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는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믿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구할 수도 있고, 찾을 수 있고 문을 두드릴 수도 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홍해를 건넌 사건과 달리 요단강을 건넌 후의 가나안 정복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예표한다. 이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의 물에 발을 담그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고 물을 갈라 주시고 만약 하나님을 불신해서 발을 담그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 하고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시기는 보리를 베는 3월 정도로 강의 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봄이 오면서 헐몬산의 눈들이 녹았을 뿐 아니라 봄비가 내리는 시기였기에 물이 강 양쪽의 언덕에 넘칠 정도였다.

 

(여호수아 3:15)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넘치도록 깊고 많은 물이 과연 어떻게 멈출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과거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구세대는 이미 다 죽고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구원받은 후에 옛 성품과 옛사람이 죽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입은 그리스도인을 뜻한다. 

 

믿음으로 출렁이는 요단강에 제사장들이 발을 내딛였을 때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고 땅이 바로 말라 버렸다.

 

(여호수아 3:16-17)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물이 멈추더라도 땅이 마르기까지 한동안 질퍽였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널 수 있도록 바로 마른 땅이 되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발걸음을 한 걸음 디딜 때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갈릴리 호수의 물에 발을 디뎠을 때 빠지지 않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구원받은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견고한 성 여리고를 비롯하여 가나안의 7 족속과 전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리고 요단강의 물을 멈추고 마른 땅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큰 힘을 얻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믿고 받아들이면 된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 갈 은혜를 입게 된다. 

 

신앙 생활은 다르다. 구원은 아무 공로 없이 거저 받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신앙생활은 내가 먼저 요단강 물에 발을 내딛는 것이 필요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처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레 행함이 나온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고 힘을 주시고 도와주셔서 그토록 강해 보였던 가나안의 7 족속을 하나씩 점령하며 승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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