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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주님이 칭찬하시는 믿음 (2)

by 오네시모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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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장 21~28절과 마가복음 7장 24~30절에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칭찬을 받은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여인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그 가나안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며 이방인을 무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영적인 교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 이방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예수님을 찾았듯이 가나안 여인은 딸이 흉악하고 더러운 귀신에 들려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5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라는 내용을 보면 그 어머니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알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즉시 그 앞에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왜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실까라는 질문을 하지만 사실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더욱 멀리 떠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 떠나 인생을 즐깁니다. 하지만 흉년이 와서 죽을 상황이 되자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이 납니다. 고난은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생에게 이 땅에서는 참된 행복이 없다고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 반복하며 강조한 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헛되고 헛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병든 종을 통해 자신이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약함을 깨닫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의 비참한 상태로 예수님을 찾았듯이 우리 죄인이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연약한 상태를 깨달고 주님께 매달리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그런데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아예 아는 체를 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인이 소리 높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부짖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이 귀찮다는 말투로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오직 딸을 낳게 하겠다는 열망 한 가지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간절히 구하는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15장 22절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성경적인 명칭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실제로 예수님이 초림 하셨을 때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복음이 전파되는 차례가 명확히 나와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세주에게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도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간절한 눈빛으로 예수님께 간구하는 여인에게 다시 한 번 차갑게 거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은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부르는 모욕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가나안 여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은 정말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차갑게 거절하려는 투로 말씀하신 것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칭찬하시고 딸을 낳게 해 주신 데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만 한 능력과 은혜로도 제 딸이 넉넉히 나을 수 있다는 여인의 믿음을 너무나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백부장의 믿음과 부스러기같이 적은 은혜만 있어도 딸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확실한 길입니다.

 

(예레미야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주님은 믿는 자 안에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가셨을 때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태복음 13:58)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순전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능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왜 능력이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간절함과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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